모노레일의난장판 :: '글자에 관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글 목록

2007. 11. 2. 23:46

첫 눈 / 박성우

첫눈 / 박성우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던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첫눈 내리는 밤을 좁은 방에 앉히고
첫눈 내리는 밤과 조근조근 얘길 나눈다
찰진 홍시 내놓고 포근포근한 밤을 맞는다

첫날 며칠만 보내고 떨어져 사는 신혼 밤
첫날밤 내내 살을 녹이던 당신은
이내 내 곁으로 와서 무릎을 베고 잠에 든다

그러면 나는 꺼낸 첫눈을 냉장고에 넣고
다시 외롭고 차고 긴 겨울밤, 잠자리에 든다



11월 북새통, 내 마음의 시

매 월 꼬박꼬박 나오고 무료인데다가 책 정보도 가득 들어있고
이렇게 좋은 시까지 있으니 무얼 더 바랄까.
나에겐 마치 매 달 새로 맞는 눈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요즘 표지엔 계속 재테크나 자기계발서만 나오는 것 같네..
뭐, 모델들은 점점 예뻐지는 것 같지만^-^;

2007. 10. 26. 13:11

한미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 - 송경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미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
 
                                                            - 송경동
 
  나도
  여느 시인들처럼
  꽃을, 사랑을 노래하고 싶다
  한 잔의 진한 커피
  한 잔의 맑은 녹차와 어우러지는
  양장본 속 아름다운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
 
  그러나 나는 늘 거리에 서야만 한다
  너희가 쓰다버린 850만 비정규직 쓰레기인간들에 대해
  노래해야 하고, 일손을 빼앗긴 350만 농민의 시퍼런 절망에 대해
  노래해야 한다. 미군기지에 밀려 다시 세 번째 생의 이주를 앞두고 있는
  팽성 대추리 노인들의 얼굴 위에
  너희들이 늘씬 퍼부어주던 포탄 선물을 받으며
  피투성이로 울부짖던 이라크 아이들의 얼굴을 겹치며
  다시 나는 거리에 서서 분노와 증오로
  피 어린 시를 써야만 한다
 
  그렇게 너희는 가만히 있는 나에게서
  나의 소중한 것들을 빼앗아 간다
  아름다운 시를 빼앗아 가고
  내가 좋아하는 내 영화를 빼앗아가고
  내 친구의 일자리를 빼앗아 가고
  이젠 그도 모라자
  내가 쓰는 전기를, 통신을, 언론을, 가스를, 물을, 약품을
  송두리째 모두 너희의 것으로 내어놓으라 한다
  100원에 쓰던 것을 1000원에 사라하고
  1000원으로 살 수 있던 생태적 삶을
  10000원짜리 경제적 삶으로 업그레이드 시켜라 한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이젠 모두
  너희의 허락을 맡고 써라 한다
  그것이 거부할 수 없는 세계화라 한다
 
  빌어먹을 이런 개똥같은 게 세계화라면
  나는 내 온몸에 불을 싸질르고라도
  전세계의 반민중적 세계화를 반대한다
  이것이 21세기 선진 세계시민사회라면
  난 정중히 그 세계시민사회에
  아니오 라고 말할 것이다
 
  나도 여느 시인들처럼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다고만 노래할 수 있는
  그런 해방된 사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거리에서 보낸 오늘 하루
  나의 젊은 날도 헛되지만은 않으리
  한낮의 꿈만은 아니리
  아, 변혁을 노래하고 싶은 밤
  아, 해방을 사랑하고 싶은 한 밤
 
 
 
실천적 시를 쓰는 송경동 시인의 새로운 시이다.
아, 나도 아름다운 것들을
아름답다고만 노래할 수 있는
그런 해방된 사회를 가질 수만 있다면

출처 : "한미 FTA는 내 시도 빼앗아간다" (프레시안)

2007. 10. 16. 10:08

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선운사에서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과일가게에서

사과는 복숭아를 모르고
복숭아는 포도를 모르고
포도는 시어 토라진 밀감을 모르고

이렇게 너희는 서로 다른 곳에서 왔지만
어느 가을날 오후,
부부처럼 만만하게 등을 댄 채
밀고 당기고
붉으락푸르락
한 세상이 아름다워지려는구나       


          

2007. 10. 13. 17:08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 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 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2007. 10. 1. 01:20

내가 가장 아프단다 - 유안진

나는 늘 사람이 아팠다
나는 늘 세상이 아팠다
아프고 아파서
X-ray, MRI, 내시경 등등으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내 안에서도 내 밖에서도 내게는, 나 하나가 너무 크단다, 나 하나가 너무 무겁단다
나는 늘, 내가 너무 크고 무거워서, 잘못 아프고 잘못 앓는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피멍들게 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대적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사랑한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나를 망쳐준 누가 없단다
나말고 나만큼 내 세상을 배반한 누가 없단다

나는 늘 나 때문에 내가 가장 아프단다.

2007. 10. 1. 00:20

밤의 피크닉 - 온다 리쿠

그러니까 말이지, 타이밍이야 ..

잡음 역시 너를 만드는거야.

잡음은 시끄럽지만 역시 들어두어야 할때가 있는거야.

네게는 소음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이 잡음이 들리는건 지금 뿐이니까

나중에 테이프를 되감아 들으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들리지 않아.

아직 두 달이나 남았지만 2007 어워드 소설부분 베스트 입성.

책관련 사이트에서 온다 리쿠 온다 리쿠 법썩을 떨길래
한 권쯤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섣불리 다시 무라카미 류의 책을 읽었다가
- 그것도 겨우겨우 끝까지 다 읽었는데
크게 상처받은 후라 (싫다. 변태아저씨-_-;)
왠지 일본소설로 다시 치유받고 싶은 기분이었다.

당연히 판타지일거라 생각하고 집어들었는데
그냥 평범한 고교생들이 학교 연례 행사로
꼬박 하루를 걷는 이야기라니 조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끝까지 다 읽고 나서는
올해 (내가 읽은) 베스트 소설로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유유자적 어른스러운척 하면서
겪어아 할 당연한 잡음들을 많이 놓쳐온 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확실히 놓쳐왔다. 그래서 실은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것들을 외면하고 피해가면서 그저 빨리 어른이 되어버리려고 했었다.
그래서 막상 어른이 되어버려서는 무언가가 부족하게 되어 버린게 아닐까하고
문득 굉장히 외면하고 싶었던 아니 계속해서 외면해왔던 사실들을
갑자기 마주해버려서 무척 당황스럽고도 한편으론 조금 기뻤다.

소설이 끝나는 지점에서
현실은 시작된다.
소설처럼 아름답고 극적이지만은 않은
그냥 살아가야 하는 그저그런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언젠가 그것이 지겹고 후회스럽고 짜증나더라도
한편으로 그것에 위로받을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고
이 구질구질한 현실들을
시끄러워도 들어야만 하는 잡음들을
긍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픈 책이 한 권 더 늘어서
기쁘다.

2007. 9. 25. 17:18

수선화에게 - 정호승

수선화에게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애와 자존심이다.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너무 사랑스러워 빠져 죽은 나르키소스가 죽은 자리에
피어난 꽃이 바로 수선화이다.

외로움은 곧 자기애의 반증이다. 오직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외로움이다. 왜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가하는 처절한 몸부림이다.
자기 자신을 동정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 그래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어떻게 보면 살아가는 건 중심을 잡아가는 과정이다.
사진을 찍는 것도 마찬가지여서 빛이 과도할 때는 빛을 더 조금만 받아들이게
빛이 부족할 때는 더 많이 받아들여야 알맞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쉽게 감정이 과도해지는 계절에는 마음의 문을 조금 닫아둘 필요가 있다.
혹은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추스릴 필요가 있다.
그래서 가을이 독서의 계절인가?(농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