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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9. 10. 00:14

추석에 즈음하여 홈에버 불매운동을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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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노동자입니까?

네이버 백과사전에 따르면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정의가 어렵다면 반대어로 풀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라는 말의 대칭점에 있는 말로는 자본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본가라는 말의 정의는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 대부하여 이자를 받거나, 그것으로 노동자를 고용·사역하여 기업을 경영함으로써 이윤을 내는 사람._네이버 국어사전'이라고 하니 기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은 노동자라고 볼 수 있겠죠.

혹 스스로가 자본가이거나 반드시 자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다음의 내용은 읽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랜드 계열의 홈에버가 문제가 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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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을 한번 해봅시다.

1000여명의 비정규직 x 연간 1000만원 = 100억원
1000여명의 정규직 x 연간 1400만원 = 140억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했을 때 드는 비용 = 40억원 + a
박성수 회장의 십일조 = 130억원
박성수 회장의 주식배당금 = 82억원

하지만 여기에 다른 셈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1000여명의 비정규직의 가족과 자녀의 삶 =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음)
이랜드 비정규직 해고가 처벌받지 못함으로 인해 앞으로 대량해고 될
운명에 처해있는 다른 비정규직의 삶 =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음)

필요할 때는 사용하고 필요하지 않을 때는 무참히 버리는 것이 자본의 논리입니다. 노동자 한명을 해고하는 일은 단순히 부품을 교체하는 일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해고하는 일이고 한 가족의 삶을 정리하는 일입니다.

  이번 비정규직 법안이 통과된 이후 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비정규직은 용역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추세입니다. 이것은 예전에는 충분히 정규직이 될 수 있었던 사람들이 혹은 정규직으로 활동하던 사람들이 비정규직이 되고 비정규직은 정리해고 되거나 용역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 라는 말들이 더 이상 우스갯소리로만 여겨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비정규직 문제입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흔히 하는 표현으로) 자신의 청춘을 다바쳐 일군 직장에서 - 가장 젊고 능력있고 할 수 있는 시기를 - 나이가 들었거나 원하던 수준이상의 효율을 발생시키지 못한다고 해서 정리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젊고 예쁜 아내를 데려와서 20년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했는데 - 그랬기에 - 나이가 들고 예전처럼 일을 잘하거나 예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이혼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자본의 논리와 시장의 논리 효율의 논리는 이런 부분을 간과합니다. 그리고 경제가 힘들때는 마치 이런 사람의 논리가 사람의 상식이 - 대개 어쩔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 무시되어 질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적어도 '사람의 상식'이 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필요에 따라 넘어갈 수 있는 충분조건이 아닌 사람이 살아가는 '필요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요즘같은 시대에 세상물정 모르는 철 없는 주장인가요?

  비정규직은 앞으로 끊임없이 확대될 것입니다. 법안도 통과되었고 제재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강제력조차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이 아이들은 돈 걱정하지 않고 평생 살아갈 수있을 만큼의 부를 축적하지 않는다면 당신 아이들에게도 고스란히 - 더 심각하게 - 다가갈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민사회가 강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분별하게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기업은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을 만들고 노동자를 해고해서 얻는 이익이 더 크지 않다는 걸 실제 체험할 수 있게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선진국에는 '사회책임투자'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회에 도움이 되는 분야 - 환경, 자선, 가정에 투자하고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 부분 - 무기, 마약, 도박, 혹은 반노동기업에 투자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투자자들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고 이를 무시하는 기업은 투자를 배제하여 그만큼 손해를 보게 강제하는 것입니다. 실제 미국의 경우 미국 뮤추얼 펀드 5달러 가운데 1달러, 미국인 여덟 가구중의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사회적 책임 투자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투자이익에서 보았을 때도 사회책임투자의 투자이익이 그렇지 않은 투자보다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사회책임투자」, 에이미 도미니 )

  비정규직과 고용의 문제 역시 이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유없이 고용자를 해고하고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지 않는 기업의 제품을 불매함으로 인해 기업의 정규직전환이나 노동자의 고용을 강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철저히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기업 입장에서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 인해 받는 피해가 더 클 경우 당연히 그렇게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대형 마트의 경우 명절 연휴가 전체 매출에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이번 추석 이랜드 기업의 불매운동을 권합니다. 이 싸움은 단순히 이랜드 홈에버 노동자들만의 싸움이 아닙니다. 모든 노동자들의 비정규직화로 가는 길목에서의 싸움이자 청년실업과 고용불안정과의 싸움입니다.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면 어떤 기업이 무슨 이유로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고 정규직을 사용하겠습니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는 길만이 청년실업과 고용의 안정성을 근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길입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당신이라면, 어떻게든 대기업에 들어가야 겠다고 생각하는 당신이라면 대기업에 취업하더라도 불안한 당신이라면

  그래서 이랜드 불매운동을 권합니다.


관련기사 :
홈에버, 매출액 0.5% 추가부담으로 전체 비정규직 정규직화 가능
4년제大 정규직 취업률 49%

2007. 8. 26. 04:03

돌아가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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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고 돌아가지 말기.
어렵다고 포기하지 말기.
세상은 원래 어렵고
삶은 원래 힘들다.

어제, 한 편 예뻐라하고 또 한 편으로는 잘 챙겨주지 못하던 AL-E를 시집 보냈다. 참 이쁘게 사진을 찍어주던 아이였는데 작은 파인더와 빈약한 셔터음때문에 한동안 서랍에만 넣어두다가도 이렇게 보낼려고 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그래도 잘 지내야 해.

2007. 8. 13. 01:27

안타까움.

최근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을 읽다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아프간사태와 D-WAR 논쟁 그리고 몇몇 이슈들에 대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차마 이야기하기 힘들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공부하지 않고도 알고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에 대해 절대적이라고

할만큼 신뢰한다. 심지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폭력적' 대응을 한다.

아직 물리적인 폭력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이 상태로라면 일본의 우익들처럼 언제 테러를

감행할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진중권씨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조건 옳고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은 무조건 잘못되었으며

'배후'에 의해 준비되거나 '세뇌'되어 조종당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는

군사독재 시대의 방식과 동일하다.


기억하고 청산되어지지 않은 역사는 반복된다. 가끔은 그 사실이 소름이 돋을만큼 두렵다.

그리고 이건 또 다시 다음 세대에게 더 큰 과제로 남겨질 것이다.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없다.

2007. 8. 11. 00:21

이랜드 일인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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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은
그저 한달에 돈 100만원만이 아니다.

타인의 아픔에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여유를 잃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인간다운 삶일까?

지금 당장 돈 100만원을 벌지못해 거리로 나와있는 
이제 막 서른, 마흔이 된 이랜드 해고노동자들의 아픔을 외면하면서
나 혼자는 적어도 나 혼자만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

그것에 인간다움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2007. 8. 9. 00:09

2차 남북정상회담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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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0일 평양, 남북정상회담 개최(통일뉴스)

남북의 정상이 다시 만나기로 합의했다. '남북 정상 상봉은 6.15정공동선언과 우리민족끼리 정신을 바탕으로 남북관계를 보다 높은 관계로 확대 발전시켜 한반도 평화와 민족공동 번영과 조국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는데 중대한 의의가 있다'고 하는 이 합의서에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

이 발표에 각계가 환영하였지만 소리 높여 반대한 한 정당이 있다. 이 같은 입장에 대해 민주노동당 김형탁 대변인은 "대선병에 걸리지 않고서야 6.15선언이후 7년 만에 열리는 정상회담을 어찌 대선용 이벤트로 평가 절하할 수 있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시기나 배후목적이 아니라 내용이다. 2.13합의가 급진전되고 있는 이 시기에 정상회담은 교착상태에 있는 남북 관계의 질적 변화와 '실질적' 평화에의 담보가 되는 아주 중요한 회담이다. 그리고 그 내용은 회담 이후에 대중이 정확히 판단할 것이다. '대선용 이벤트'와 '민족적 경사'를 대중들이 판단하지 못할 거라는 시대착오적 엘리트의식을 버려야한다.

벌써부터 한반도평화체제 구축과 경제협력 등 의제와 관련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가운데 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어떻게 잘할 것인가를 기쁘게 기다려본다.



2007. 7. 27. 03:29

20년만의 복직 / 김진숙

영제 형.정식이 형의 복직이 일년 여 전에 결정이 되고,그 시간동안 때때로 가슴속을 구르는 말들이 있었고,그 말들을 언젠가 글로 옮기게 된다면 전교조 부산지부 게시판일 거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굳이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겠으나 이제사 묻게 됩니다.

왜 거기일까.하필..

부채감..20년 세월동안 내가 지녀 온 부채감을 헤아려 줄 사람들이 거기에 가면 가장 많지 않을까 하는 막연하나 확실한 추측.

이 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아마도 '부채감'이 될 거라는 예감.

그 때..17년 전..

세상 그 많은 사람들이 탈퇴자와 해직자로만 오로지 인류를 구성했던 시절.

한쪽은 외로워도 슬퍼도 내놓고 울 수도 없었던 캔디가 되고,또 한쪽은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마징가제트처럼 느닷없이 살아야 했던..그 때.

옥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모든 남자들은 다 짭새들로 보이고,버스에서 내릴 때도 맨 마지막에 내리고,바로 앞에 목적지를 두고도 빙빙 돌아 다녀야 했고,다방을 가건 식당을 가건 뒷문과 퇴로를 확인하고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수배시절,제게 옷을 주고 밥을 주고 잠자리를 주던 친구였습니다.

"니보덤 똑똑헌 사램덜 말캐 다 빠짔는데 니가 와 거 들어가 이 난리버꾸를 직이노? 전교조 안해도 니만 깨깟게 하고 아아들 한테 돈 안받고 지금 맨치로 그라먼 될 거 아이가? 오늘 학죠 가거들랑 내는 피치못할 집안 사정도 있고 이래 이래 해가 인자 빠질랍니다 그라고 오이라이.어이?"

몇 번 씩이나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성화로 불편한 아침이 시작됐고,

"그래하고 왔나? 니가 우짤라꼬 이라노? 이라기를.어이? 아무캐도 집터를 잘 못 잡았기나 조상 무덤을 잘 못 썼기나 구신이 곡절을 한 기 아이먼 이랄수가 읎다.이기 무신 곡절이고.곡절이"

퇴근하는 딸내미를 기다리며 대문 앞에서부터 시작된 어머니의 장탄식이 자정을 넘어서면 "니가 질게 이라먼 내가 마 팍 죽어삘끼다" 하는 협박으로 뒤숭숭한 꿈자리까지 이어지곤 했습니다.

교장이나 교감한테서 집으로 전화가 온 날은 그 강도와 빈도가 훨씬 심해졌고,그런 공간에선 더이상 전교조가 추구하던 이상이 해맑지도 않았고 참교육의 꿈이 뽀얗지도 않아,가족 모두가 등을 돌리고 앉아 각자의 신경세포를 줄톱으로 날카롭고 뾰족하게 갈아 전교조가 드리운 암운을 무찔러대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여름방학 시작 무렵이었다고 기억됩니다.

더는 피할 수 없었던 교장의 전화를 이 친구가 받을 수 밖에 없는 날이 있었고,방학 중 학교로 향하는 이 친구의 곁을 동행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힘이 되고자 했다기 보다는 내가 이러고 있는데 니가 탈퇴를 해? 솔직히 그런 마음이었죠.

그 친구가 교장실로 들어간 후 저는 남여중 운동장 한 가운데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던 한 여름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나무처럼 몇 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당할 고통의 시간들을 그렇게라도 나누고 싶었던 의리의 차원이 아니라,그 친구가 탈퇴서를 쓰고 나온다면 추상같이 들이 밀 원칙같은 게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점심도 굶고..사위어가던 햇빛 탓이었을 테지만..흔들리며 저만치 계단을 허깨비처럼 걸어 내려오던 친구..

그날의 태양은 서산으로 진 게 아니라 그 친구의 눈 속에서 서럽게 지고 있었고..

땅만 보고 걸으며..영도다리 위에서 그 친구 걸음을 멈추고..

그때도 저는..탈퇴했다는 말을 듣게 되면 제가 해야 할 비판이나 충고 종류의 수칙같은 말들만 가슴속에 잔뜩 재놓고 있었습니다.

이미 검어진 바다는 장마 진 여름날 툇마루에서의 낮잠처럼 끈적이며 혼곤히 뒤척이는데.."죽고 싶어"

옥이는..그 바다를 보며 그렇게 말했습니다.

게으른 도시의 바다마저 당혹스러워 했을 그 절망 앞에 제가 지닌 것의 전부였던 주옥같은 원칙들은 별안간 사소하기 짝이 없어졌고 그 후 우리는 마주 보는 일, 웃는 일을 도무지 할 수가 없어서.. 헤어졌습니다.

10년..합법화되고..마침내 학교로 돌아가는 선생님들을 보면서 저는 그 갈채 뒤에 숨죽인 수많은 옥이들을 생각했습니다.

느닷없이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그이들의 부채감에 대해..

막상 복직하는 당사자보다 사실은 더 기뻤을터이나 내놓고 기색하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을 그이들의 마침내 안도감에 대해..

그 안도감을 얻기 까지..

정문 앞에서 끌려 나가던 동료들을 창문 너머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던 무수한 자괴감에 대해..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료들을 밖에 둔 채 들어가서는 수많은 시간들을 죽고 싶은 채 살아있어야 했던 열패감에 대해..

그리고..비겁이라는 감옥을 제 손으로 짓고 제 발로 그 안에 들어가 10년을 장기수로 복역해야 했던 그 분들이 그 감옥에서 이제는 출감하기를 진심으로 바랬습니다.

그리하여 따뜻한 밥상 앞에서 더 이상 목 메이지 않기를..

누군가가 두들겨 맞는 시위장면을 보더라도 더 이상 채널을 돌리지 않기를..

빨래를 걷다말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다보는 일이 없기를..

아이들에게 정의라는 단어를 말할 때 도리같은 단어를 말할 때 공연히 창밖을 바라보는 일이 더 이상은 없기를..

한진중공업 해고자로 만 20년을 견뎠던 박 영제 형,이 정식 형이 새해 1월 1일 복직을 합니다.

그 형들이 단지 저 때문에 해고됐다고 말하면 그 분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제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습니다.

말당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을지 모를 일이나 저를 여기까지 꾸역꾸역 떠메고 온 건 9할이 사실은 부채감이었습니다.

저들이 저 자리를 지키고 있는 한 내가 먼저 떠날 수는 없는..

그러면 어디가서 뭔 일을 하고 살더라도 필시 응징을 당하고야 말 것 같은..

이제 와 말이지만..떠나고 싶은 날들이 얼마나 많았는데요.이제는 정말 벗어나고 싶었던 순간들이 얼마나 시시때때 였는데요.

그래서 제가 막 못되게 굴어도,고랑을 파고도 남았을 상처들을 주었음에도 날 한번 세우지 않던 그들의 둔함이 쇠심줄 같던 늑수긋함이 권태기처럼 지긋지긋했던 날들이 또 얼마나 많았게요.

제발 내일 아침에는 저들 중 누구 하나라도 안 나타나기를..힘들어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취중이라도 선언해주기를 얼마나 빌었는데요.

차마 먼저 가겠단 말은 못하고 그걸 빌미로라도 그만 떠나고 싶을 만큼 고단했던 날들.

질풍은 일언반구도 없이 외부로부터 불어 닥쳤고,의지와는 별개로 노도가 되어 내달려야 했던 우리들의 청춘.

제가 스물여섯,정식이 형 스물일곱,영제 형 스물여덟..

그래서 저는 청춘이 참 싫습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레 여기 저기 쑤시고 아픈 대공분실..

그리고 세 번의 부서이동..대기발령..해고...

그리고 출근투쟁..

머리띠를 매 본 적도 없었고,남들이 맨 걸 본 적도 없었고,복수에 빛나는 총탄 같은 물건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모르던 천둥벌거숭이 때였습니다.

우린 저길 들어가야 한다고..저기 화이바도 있고 안전화도 있고 작업복도 있고 공구통도 있고 수건도 빨아야 하고 쥐가 안먹게 비누 뚜껑도 챙겨야 한다고..들어가게 해달라고..경비 아저씨들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게 그 때 우리들의 출근투쟁이란 거였고,싸우러 간 놈이 경비 아저씨를 보면 저절로 인사를 하게 되던 오래된 노예의 습성조차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자행하던 때였는데,지금 생각하면 웃기도 민망한 그 남루한 출투에 대한 대접은 너무나 심오했습니다.

어용노조 간부들 수십 명,회사 관리자들 수백 명,경비들 수십 명,그걸로도 우리 세 사람의 막강한 힘을 감당할 수가 없어,국가기간산업을 불순분자의 준동으로 부터 사수하기 위한 공권력 수백 여 명,그리고 닭장차들.

많이 맞았습니다.수천 대도 더 맞았고,수백 번도 더 짓밟혔습니다.매일 아침마다..

배나 허벅지처럼 표면적이 넓은 부위엔 발자욱이 그대로 멍자욱으로 찍혀 있는 날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그때는 욕 한마디 할 줄 몰라 "왜 퍄! 왜 자꾸만 퍄!"만 입술에 침버캐가 허옇게 말라 붙도록 되풀이 했던 진짜 촌스런..

어느 날 밤엔 회사 앞에서 식당을 한다는 아주머니가 일부러 제 자취방까지 오셔서,"그래 뚜디리 맞아가매 말라꼬 맨날 오노.어데 치직할 데 없이모 내가 치직 시키주꾸마.지발 낼버턴 오지 말그라.너거 그라는 거 아칙마다 보머 하로 왼종일 심장이 고마 벌렁거리싸서 살수가 읎다.그라다 죽어삐모 누가 알아줄끼고.니야 죽어삐모 고마이라 생각카겠지마 맞아 죽으모 저승인들 지대로 가겄나.억울해가 우예 가겄노.그 몸띠로 저승이나 찾아 가겄나.느그도 부모가 기시고 헹제가 있일 거 아이가.부모 헹제간이 그 꼴로 밨다 캐바라.그 가심이 으떻겄노.천갈래 만갈래 안 째지겄나.지발이지 한 날이라도 더 산 내 말 듣고 다시는 오지 말그라이.어디 먼디로 가가 안보고 살모 고마 이자삐고 살아진다" 신신당부를 하고 가시기도 했고,언젠가 부터는 아예 집 밖을 나오지 못하게 집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도 남아 산복도로 위에 까지 진을 친 그들을 보며,주인 할머니는 "저 사램덜은 쥐두 새두 몰르게 사램을 쥑이"하는 말씀을 "저짝 뻘갱이덜 보덤 이짝 퍼랭이덜 허구 양코배기덜이 더 쥑였어.그 늠덜은 들어올 때 쥑이구 나갈 때두 죄 쥑이구덜 나갔!
어" 목소리를 낮추시고 애무완이라는 총의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까지 하시던 '육요즌쟁'때 얘기만큼이나 은밀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말들이 아니어도 충분히 무서웠습니다.

꿈에서 조차 울었던 시간들..

머리 밑이 아파 베개를 벨 수도 없었고 머리에 손이 가면 암환자처럼 한 웅큼씩 묻어나던 머리카락들..

밤마다 떨어진 단추 다시 달고 튿어진 바지랑 남방을 일과처럼 꿰매고 자리에 누우면..공포만이 저 혼자 밤을 새워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잎을 틔우고 울울창창한 숲을 이루어 비옥한 영토를 늘려가던 밤들..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밤이 이어지기를 간절히 빌었던 시간들..

그래도..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야 했던 건..오로지 그들이 거기 오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한번도 위로 같은 걸 서로에게 해준 적은 없으나 나만 당하는 사변이 아니라는 유일무이한 위안..

쓰다가 생각난 일..

매일 아침 만나 거의 하루종일 붙어 다녔는데,어느 날 두 사람이 모두 안보이던 날이 있었습니다.

대공분실..그냥 덮어놓고 무작정 거기가 가장 먼저 생각나던 그런 시절이 분명 있었습니다.

두 번을 다녀왔지만 보자기 덮어쓴 채 오갔던 길이었습니다.

극도로 공포스런 상황에선 오감이 참으로 예민해지는 경험을 그 때 했습니다.

감으로만 더듬어 찾아갔는데..거기에..그 곳이..있었습니다.

좌천동에 있는 간판엔 버젓이 한국해양개발공사라로 써있는..군인들이 총들고 서서 해양을 개발하는..

박 영제 내놓으라고..이 정식 내놓으라고..혼자 미친 듯이 소리 소리를 지르며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그 건물을 빙빙 돌았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기도 했지만,그런 곳에서 혼자 당하는 일들의 두려움..들을 알기에..

직접적으로 육신에 가해지는 위해 보다 여기서 이러다 혼자 죽게 되는구나..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 걸 세상 사람 아무도 모르겠구나..

저들 말대로 송도 앞바다에 돌멩이 매달아서 던져 버리면 정말 감쪽같이 아무도 모르겠구나..하는 절망이 훨씬 크다는 걸 알기에,형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는 걸..그러니 형들이 그렇게 죽게 되더라도 아무도 모르는 건 아니라고..

세 사람을 한꺼번에 감쪽같이 처리하긴 아무래도 어려운 점이 있을테니까..

사지를 번쩍 들려 안으로 끌려 들어가선 살아있는 입부터 방성구로 채우고 또 맞았습니다.

이번엔 겁대가리 없다고..

내 발로 걸어 찾아간 곳에서 여기 왔다갔다는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않는다는 각서에,이미 힘이 빠져 늘어진 제 손가락을 끌어당겨 그들이 지장을 찍는 절차까지 일점의 차질도 없이 마무리 한 후에 보자기를 덮어씌운 채 그들이 저를 데려간 곳은 산복도로 위도 아니고 태종대도 아닌 이번엔 영도 경찰서였습니다.

아..ㅆㅂ,이번엔 강력계 $%덜이 줘팰랑갑다.하고 부려졌는데..

다행히(?) 형들은 그 곳에 있었고..벅찬 것도 아니고 감격스러운 것도 아닌 참 복잡한 조우를 하면서.. 생각했습니다.

우린 결국 아무도 떠나지 못하겠구나.

그렇게 20년 이었습니다.

중풍으로 쓰러지셔서 대소변 받아내며,모임을 하다가도 집으로 달려 가 진지를 챙겨드리고 다시 나오던 참 착하고 무던한 아들 영제 형의 홀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저를 보시자 거동도 잘 못하시는 몸으로 벌떡 일어 서셔서는 지팡이로 제 등짝을 후려치셨던 정식이 형 아버님도 돌아가시고..

저만 보면 "어이예이.우리 식이 좀 놔주게이.우리 식인 멕여 살릴 식구가 많다이.그러니 고만 놔주게이" 간절히 애원을 하셨던 정식이 형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뻑하면 수배중이던 딸 때문에 입원을 해도 경찰들이 진을 치는 바람에 남 부끄러워 입원도 못하신다며 7년을 누워 계시면서도,몇 년 만에 한번 씩 바람처럼 왔다가는 딸에게 "복직했냐?" "은제허냐?"를 제일 먼저 물으시던 우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20년은 그렇게 긴 세월이었습니다.

수백 번이고 장담하건데 그 형들이 없었으면 저도 없었습니다.

네가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이런 길이란다.누군가 미리 일러 줬더라면 단 한 발짝도 떼지 못했을 길을 그 형들의 등에 업혀 여기까지 왔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고 있으면서도 그 역할을 암만해도 수행할 수 없었던 죄책감 때문에,버스를 타면 따라 타고 택시를 타고 같은 차에 따라 타는 미행도 아닌 아예 동행들을 견딜 수 없어 집을 나와 전포동에서 영도까지 토큰 하나가 없어 영도까지 뛰어다녀야 했던 날들..

새벽 유인물을 뿌리러 달려가다가 어느 집 대문간에 내놓은 사자밥을 주워 먹으며 진종일 굶은 전날의 허기를 메꾸던 날들..

해일만 날마다 일던 그 바다를 형들이 만든 뗏목에 얹혀 건너 왔으면서도 막상 빛나야 할 자리에서는 저는 혼자만 빛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런 만큼 형들은 가려져야 했습니다.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이 해고자 끼니 보다 빈번했던 시절에도 형들은 그에 대한 불평 한 번 없었기에 저는 서슴없이 오만할 수 있었고 우쭐하기에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 오만함과 방자함에 대해 일말의 가책도 제가 느끼지 못할 만큼 무던하던 형들..

그 때는 그 무던함의 가치를 잘 몰랐습니다.
그 형들이 복직을 합니다.

그 때 우리가 아저씨라고 불렀던,세상에 못 만드는 게 없었고 못하는 게 없었던 그 하늘같던 아저씨들의 나이를 훌쩍 넘어선 정식이 형이 마흔여덟,영제 형이 마흔아홉..그 나이에 이르러서야 복직을 합니다.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산복도로 위에서 수천 번도 더 내려다 본 공장엘 이제야 들어갑니다.

길에서 마주치는 날이면 온종일 가슴에서 냇물 흐르는 소리가 나곤 했던..저걸 언제 다시 타보게 될까..그 통근버스를 타고 출근이란 걸 하게 됩니다.

세 사람 잡겠다고 영도다리에서 부터 버스며 택시들을 일일이 세워 이 잡듯 뒤지곤 하던 그 영도다리를 버젓이 건너 출근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버둥거려도 한 뼘도 들어갈 수 없었던 그 정문을..걸어서..들어가게 될겁니다.

20년 동안..뭐가 달라졌냐고 하지만..

쥐똥이 콩알처럼 섞여 나오던,여름이면 쉬고 겨울이면 살얼음이 덮이던 도시락이 아니라,30억을 들여 새로 지은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될겁니다.

일 년에 단 한 벌뿐이던,여름이면 허연 소금꽃이 수백송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던 빵구 난 작업복이 아니라,사시사철이 구분되는 작업복을 입게 될겁니다.

추운 날 바다에 빠져 죽은 동료의 죽음에 대해 옷을 많이 껴입어서 죽었다는 목격자 진술서에 도장을 찍고는 그 죽은 이의 집을 피해 빙 둘러 다니는 일도 이젠 없을 겁니다.

그리고..

빨갱이들 곁에 오지도 못하던 아저씨들이 먼저 와 악수를 청하게 될 것이고,블록에 함께 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는 소원도 이루게 될겁니다.

억지로 금치 당했던 작업복이며 안전모며 안전화며 명찰이며 출근카드며 공구통들에 새로 생긴 사번을 새기게 될 것이고 박 영제,이 정식이라는 이름들을 아주 매매 써넣게 될것입니다.
배가 아주 안 아픈 건 아니오나..

그보다는 20년 동안 두레박처럼 매달려 걸핏하면 쿠당탕탕 가슴 속 여기 저기를 부딪곤 하던 육중하고 녹슨 쇳덩어리 하나가 후두둑 더께앉은 녹찌꺼기를 분주히 날리며 비로소 철거되는 기쁨이 훨씬 큽니다.

내가 그런 게 아니야..나 때문에 그렇게 된 게 아니야..내 잘못이 아니야..골백번도 더 중얼거렸던 업장같기만 하던 그 길고 둔중하던 부채감을 이제야 내려놓습니다.

며칠 전 "20년만에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는 대단한 복직인데 잔치는 못하더라도 하다못해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께 인사라도 해야지요" 하던 제 말에 "뭘 그래까지 하요" 하시던 영제 형.
세 사람이 같이 서서 인사를 하다가 두 사람은 들어가고 한 사람은 밖에 남겨지는..
내가 비로소 내려놓는 그 만성적이고 고질적인 부채감을 형들에게 고스란히 되지우는 게 아니길 바랄뿐입니다.

그리고..

박 창수..김 주익..곽 재규..그들에 대한 부채감도 20년 아니 40년이 걸리더라도 이렇게 내려 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새해 복들 많이들 나누시고..내내 건강하시고 행복하십시오.


출처 :
http://www.hadream.net/zb40pl3/zboard.php?id=janggyu&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it&desc=desc&no=11

김진숙 지도위원이 책을 냈다는 얘기는 전부터 들었지만 쉽게 손에 잡히지 않았다. 4년 전 김주익 열사 추모사를 처음 들었을 때 부터 그는 마음을 정말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다. 근 4년만에 그 추모사를 다시 듣고 괜히 눈물이 핑 돌았다. 이랜드에서 정리해고 된 분들이 마음에 걸려서 그리고 70년에 죽은 전태일의 유서와 2003년에 죽은 김주익의 유서가 같은 나라라는 말이 너무 가슴에 박혀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힘들게 손에 든 김진숙의 책 '소금꽃나무'에선 첫 꼭지부터 날 끝없이 부끄럽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지하철 가운데서 괜스레 눈물이 나 몇 번이고 책을 접어야 했다. 그의 삶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다들 스스로를 추스리기만도 벅찼던 날들의 기억이 떠올랐다. 하루가 지나면 또 누가 없어질까, 옆에 있는 사람의 숨소리조차 견디기 힘들었던 시절이 생각나서 아팠다. 김진숙에게 박창수, 김주익, 곽재규열사가 부채감의 근원이라면 나의 부채감은 그 때 붙잡지 못했던 동지들과 또 그 때에도 곁에 있어준 동지들이다. 길을 가다 어딘가의 투쟁에서 아는 얼굴이 마주칠까 불편해 할.. 또 어딘가의 뉴스에서 민중들의 삶을 보며 안타까워 할 그들의 몫까지 싸워야 할 채무가 나에겐 있다.

편하게 살아간다는 건 그 순간부터 죽어간다는 뜻이다.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사람은 불편하다. 아니 불편함이 하루하루를 살아내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나를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 그의 부채감을 덜어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가까워져 왔으면 좋겠다. 아직 한없이 부족하지만 나의 부채감 역시도..

2007. 7. 5.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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